thisisneverthisisneverthat

WR20SPT003NA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Season
SS20: Soft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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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20SPT003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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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냐 저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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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20SPT003NA

이것이냐 저것이냐

정지돈(소설가)

늙음은 젊음의 꿈을 실현시킨다.
스위프트의 경우를 보라.
그는 젊어서 정신병원을 세웠지만,
늙어서 그 자신이 거기에 입원하였다.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개요

2020년 1월 7일 화요일 오후 5시 16분 출판사 워크룸 프레스에서 청탁 메일을 받았다. ‘thisisneverthat’이라는 패션 브랜드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책과 웹사이트를 만드는 중이고, 그 책과 웹사이트에 실을 단편소설 또는 단편소설에 가까운 무엇을 써달라는 내용이었다. 다음은 책과 웹사이트의 편집자(겸 민구홍 매뉴팩처링[Min Guhong Manufacturing] 운영자) 민구홍이 보낸 소설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과 제반 사항이다.

  • 결과물: 단편소설 또는 단편소설에 가까운 무엇
  • 지침: ‘이것’과 ‘저것’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
  • 분량 : 원고지 50매 이내 (최소 40매)
  • 마감일: 2020년 3월 6일 금요일
  • 원고료: 원고지 매당 15,000원(최대 75만 원)
  • 참고 사항: 워크룸 프레스 스타일 가이드(한편, 원고가 영문으로 번역될 수 있음)

나는 같은 날 밤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지침에서 ‘이것’과 ‘저것’이라는 대명사만 사용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고유명사를 사용해서는 안 되며 ‘이것’과 ‘저것’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다음날 오전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본디 고유명사까지 제한하는 방식도 생각했는데, 그러면 제약의 힘이 지나치게 세지지 않을까요? 고유명사를 제외한 대명사만 ‘이것’과 ‘저것’으로 활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침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후보가 있었습니다. 지침 자체보다는 ‘느낌’에 집중하시고, 마음에 드시는 게 있다면 그대로 적용하시거나 기존 지침을 수정해 포함하셔도 좋습니다.

  • 브랜드명에서 추출한 요소인 ‘이것’, ‘결코’, ‘저것’, ‘아니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 ‘이것’과 ‘저것’에 관해 서술한다.
  • ‘이것’이 ‘결코’ ‘저것’이 ‘아니게 된’ 국면을 고안한다.

나는 이것이 무척 흥미로운 청탁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쓸 때 ‘이것’이나 ‘저것’을 많이 쓰는지, 그것만 써야 하는 제한이 어느 정도의 제약이 될지 의문이 들었지만 추세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10여 년 전에 지금은 사라진 극동방송국 근처의 에이랜드에서 thisisneverthat의 남색 코트를 산 기억이 났고, 꽤 오랫동안 잘 입고 다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방송 영상을 전공한 친구의 졸업 영화제에 입고 갔는데, 당시 들고 다닌 잭 스페이드(Jack Spade)의 가방과 코트가 잘 어울려 사진을 여러 장 찍은 것도 기억났다. 그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게 변했다. 친구와는 연락이 끊겼고, 가방과 코트는 버렸으며, 잭 스페이드는 이제 딱히 살 이유가 없는 브랜드가 됐다.

지침에 관해

울리포(OuLiPo, Ouvroir de littérature potentielle) 같은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그룹들은 소설을 쓸 때 이것저것 제약을 뒀다. 알파벳 e가 들어가는 단어를 쓰지 않거나 e가 들어가는 단어만 쓰거나. 한편,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나 브리온 기신(Brion Gysin)은 다른 글에서 자른 내용을 붙여 글을 완성하는 컷업(Cut-up) 기법을 활용했다. 이런 제약은 글을 흥미롭게 변형할 수 있다. 자아나 습관, 관습 밖으로 행위를 꺼낼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출신의 미학자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는 제약이야말로 작품을 완성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제약, 일종의 한계가 없다면 작품은 영원히 확장되고 전진하게 될 것이다. 보리스 그로이스는 말한다. “우리의 한계가 우리를 완성시킨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이야기다. 실제로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그런 제약이나 조건 또는 수학적 규칙에 따라 글을 쓰는 시도에 큰 의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규칙이 정해지고, 그 규칙을 위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는 순간, 글을 쓰는 일은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 글이 흥미로운 건 그곳에 위반의 가능성이 있으며 동시에 그런 위반이 한계를 깰 뿐 아니라 한계를 재도입하기 때문이다. 규칙은 오로지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 탄생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규칙은 1) 명시적이어서는 안 되며 2)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걸 규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은 알파벳 e를 사용하지 않은 소설 실종(La Disparition)을 쓰고, 그 뒤 소설의 제목처럼 모음의 위치에 e만 사용한 소설 돌아오는 사람들(Les Revenentes)을 썼다. 사전 지침, 즉 제약은 그에게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이자 성경이었다. 따라서 제약을 위반하는 일은 그에게 작품의 균열, 나아가 붕괴를 의미했다. / © Paille

전개

청탁을 받은 지 한 달 정도가 지나 작업에 착수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지침을 적용하는 것과 지침을 위반하는 것 모두를 거의 포기했다. 지침 탓인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SM 플레이에 빠진 신학도 게이의 연애담을 다룬 소설을 조금 썼지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왜 이런 얼빠진 소재가 떠올랐는지 의문이었다. 이것이 결코 저것이 아니게 된 국면이 도래하리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쉬운 예로 이 관계가 결코 사랑이 아니게 되는 이야기라거나, 이 사랑은(this) 결코(never) 그런 사랑이(that) 아니라거나(is) … 게이 친구의 경험담이 소설 구상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친구는 채팅 애플리케이션으로 젊고 몸이 좋은 목사 게이를 만났다. 피부가 깨끗한 교회 오빠 같은 목사는 자신을 발가벗기고 묶은 뒤 세게 한 방 갈겨달라고 부탁하는데… (후략)

친구의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이것이 저것과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고, 네이트 판에서 읽을 법한 이야기를 쓰는 것 같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이야기로 들었을 때 좋은 이야기와 글로 읽었을 때 좋은 이야기는 분명히 다르다.

지인은 출판계나 문학계의 글이 점점 네이트 판 게시물처럼 변해가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것은 절대 저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리가 바뀐 것이다.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예언했듯 2차 구술 문화의 시대가 온 걸까. 문장이 말을 옮겨놓은 것처럼 가벼워지고 감정적이 되는 걸까.

(…)

불안의 책

구분과 선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건 의미가 아니라 구분과 선택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분과 선택의 관점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게 동시에 가능한 건 아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이것인 동시에 저것인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아니오’라는 언어를 가지는가?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 오늘이 성탄절인가요?. “매해 12월 이맘때면 문득 궁금해지곤 한다. 올해는 얼마나 다사다난했고, 이듬해는 얼마나 다사다난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이 성탄절인지. 진실, 또는 진실에 가까운 무엇은 강한 긍정과 강한 부정 둘 사이에 있다.” 웹사이트의 형식을 띠는 제품은 오늘이 성탄절인지 파악해 고객에게 알려준다. 결과적으로 고객이 마주하는 문구는 대개 “아니오 !(No!)”다. 그뿐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이것인 동시에 저것인 경우는 없다. 오늘이 성탄절인가, 아닌가. 원고는 완성되는가, 아닌가. 제품은 중국과 베트남에 자리한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가, 아닌가. https://products.minguhongmfg.com/is-it-christmas-today / © 민구홍 매뉴팩처링

1811년에 태어나 1855년에 죽은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에게 선택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약혼자 레기네 올센(Regine Olsen)과 파혼하고 코펜하겐을 떠나 베를린으로 갔다. 헤겔의 철학을 넘어섰다고 소문 난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다. 키르케고르는 강연을 듣고 난 뒤 친구 에밀 보에센(Emil Boesen)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셸링은 터무니없는 횡설수설을 늘어놓고 있소. 그의 강연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소. 참을 수 없는 헛소리! 나는 베를린을 떠나 코펜하겐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완성하기 위해.”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그는 두 가지 관점을 충돌시킨다. 심미적인 관점과 윤리적인 관점. 다시 말해 쾌락을 쫓으며 살 것인가,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살 것인가. 그러나 둘 중 어느 쪽 삶이 더 나은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세간의 평가와 달리 중요한 건 두 관점의 내용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 그 자체다. 키르케고르는 선택이라는 문제를 정식화하고 파고든 거의 최초의 철학자다.

선택은 불안을 야기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결론, 불안은 존재의 본질이다. 동시에 불안은 자유를 가능케 한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신의 금지가 있었기에 아담에겐 선악과를 먹느냐 마느냐를 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의무와 책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방기할 수 있다. 선택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 있지만 우리에겐 우리를 망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결론, 자유는 불안의 결과다. 현기증은 추락에 대한 공포로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 안의 떨어지고자 하는 충동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를 망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우리를 현기증 나게 한다. 고로 선택 → 불안 → 자유는 우로보로스(Ouroboros)의 원처럼 끝없이 맴돌며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자유 → 선택 → 불안 (…)

(…)

결혼을 하라. 그러면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말라. 그래도 역시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든 않든 간에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세상의 어리석은 일을 보고 웃어라. 그러면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세상의 어리석은 일을 보고 울라. 그래도 역시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그대 자신의 목을 매달라.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그대 자신의 목을 매달지 말라. 그래도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그대 자신의 목을 매달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목을 매달거나 매달지 않을 테지만, 어느 쪽을 택해도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이것이 모든 철학의 총화이자 알맹이다. 진정한 영원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뒤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 앞에 있다. 내 철학은 이해하기 매우 쉽다. 내겐 단 하나의 원칙만 있을 뿐이고, 그 원칙에서 출발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원칙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건 그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이해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나 그것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에 꼭 같이 반대한다는 뜻으로, 즉 원칙 그 자체에 대한 소극적인 표현이다. 나는 내 원칙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중지하려 해도 중지할 수가 없다. 나의 영원한 출발은 곧 나의 영원한 중지다.

이것이 내가 아무런 일도 구하지 않고 책을 출판하지도 않으며 독립하지도 않고 친구도 사귀지 않는 이유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선택에 대한 거부는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애인 필리스(Phyllis)는 그에게 고삐를 채우고 등에 올라타 채찍을 내려친다. 여기서 던질 만한 질문은 ‘왜?’가 아니라 엄밀히 따지면 ‘무엇을 위해?’다. 본디 SM 플레이에 빠진 신학도 게이의 연애담을 다룬 소설을 조금 썼지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왜 이런 얼빠진 소재가 떠올랐는지 의문이었다. 이것이 결코 저것이 아니게 된 국면이 도래하리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기대한 바가 이룩되리라는 기대는 대개 기대만큼 이룩되지 않는다.

(…)


소설가 정지돈은 2013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눈먼 부엉이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과 창백한 말로 2016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싸우듯이, 문학의 기쁨,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팬텀 이미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등을 썼다.



이것은 이것이 결코 저것이 아닌 것이 결코 아니다

thisisneverthat·워크룸
스트리트 패션과 유스 컬처

박세진